2009년 12월 29일
2009 12월 28일 집놀이 공지!
# by | 2009/12/29 00:00 | 잡담 | 트랙백 | 덧글(1)
# by | 2009/12/29 00:00 | 잡담 | 트랙백 | 덧글(1)
책을 읽고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던 책입니다. 많은 이야기가 거리가 있겠지만 제가 읽는 내내 중점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1)남성과 여성이 공존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2)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로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1) 여성이 세상에서 타자가 아닌 주체로서 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획득하기 효율적으로 합리적으로 획득하기 위해서 택해야 하는 기본적인 노선에 공존의 필요성이 포함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봤을 때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노선에 과연 그것이 필요한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여성이 주체로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 하여 착취하기 하기 때문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고 있다는 인식(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과 지금까지 여성을 착취함으로써 얻어온 이득을 포기하겠다는 자발적인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은 현재 누려온 이득에 대한 반성이 없으며 혹 반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남성이 되기 위해서 자신이 누려온 이득을 포기 하는데 본능적인 거부감(즉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남성은 외부의 자극 없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남성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의 기준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검열 해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남성 스스로를 분열 시켜 스스로의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부차적인 에너지를 사용하게 만들며 그러한 피곤함을 의지적으로 멈추지 않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2) 결국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생각해야 하며 다음으로 자신의 어떤 행위가 다른 누군가를 소외시키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먼저, 스스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타인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당위로 작용할까요? 혹시 그것이 당위로 작용한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자신이 행위가 누군가를 소외시킨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소외 당한 누군가가 소외시킨 누군가에게 말해줄 때 알 수 있는 것인데(자신이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 아닌 이상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이 누군가를 소외시켰다고 알게 되었을 때 이미 누군가는 소외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논리가 내가 누구를 소외시키는지 알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해쳐나가야 할 상황이며 그 상황이 딜레마적 상황인 것일 뿐입니다.
ps : 정리하고 나니 오직 회의적인 글이 되어버렸는데,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의미 없음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더 확실한 디딜 곳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
# by | 2009/05/11 00:18 | 보관용 | 트랙백 | 덧글(0)
# by | 2009/02/26 02:05 | 잡담 | 트랙백 | 덧글(2)
# by | 2009/02/21 22:20 | 잡담 | 트랙백 | 덧글(3)
# by | 2008/12/21 17:08 | 잡담 | 덧글(3)
간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다크나이트였지요. 용산cgv 아이맥스관에서 보았는데 과연 아이맥스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사실 이 영화에서 관객에게 뭔가 크게 터지거나 하는 장면으로 카타르시스를 주려고 한 장면이 그다지 없어서 그렇게 효율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볼 만 했던 것 같습니다. 배트맨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더군요.
# by | 2008/08/13 02:33 | 감상문 | 트랙백(2) | 덧글(4)
이 책은 저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김영뿅씨한테 받은 책입니다. 아마 “제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읽은 것을 보고 선물해 준 것이 아닐까 싶은데, 참으로 적절한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전의 포스팅에서 놓친 것이 무엇인가 잘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참 좋았네요.
일단 이 책은 강연 내용을 책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말하는 투로 서술되어있지요. 읽는 입장에서 정보의 밀도가 높진 않았지만 재미있게 읽혀서 빠르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 오가는 중에 일주일 안에 다 읽어버렸으니 소설책이 아닌 것 치고는 빨리 읽혔죠. 내용은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에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대선까지의 선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중요하게 주장하고 있는 바는 선거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작용해왔다는 것입니다. 뭐 이건 읽어보시면 될 일이고, 역시 제가 주목한 점은 책 말미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박정희가 왜 아직도 그리 인기가 많은가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필자는 그 이유를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역사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박통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군부,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을 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가 어떤 모습이었는지(체육관 선거, 반정부 인사 체포 감금, 김대중 납치사건, 5.18 민주화 운동 무력 탄압, 당시 언론들의 보도 행태, 뭐 다 적을 수도 없습니다) 아는 사람 혹은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죠. 또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겠다고 말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을 했다는 사실이라던가. 이런 거 아는 사람이 지금 얼마나 되나요? 그리고 그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곳이 한나라당이라는 것, 이명박 대통령이 BBK 사건으로 분명히 연루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 또 이제 아무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 다는 것……. 문국현이 이회창이랑 교섭단체를 함께 만드는 것에 동의 했다는 것. 노무현이 파병동의안, 연장 안에 동의 했다는 것, 기타 등등. 저는 이런 사실들이 너무 쉽게 잊히고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일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혹은 잊게 하는 것 이런 것이 정말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죠.
물론 저도 몰랐습니다. 이 책 읽기 전까지는 말이죠. 아니 사실 몰랐다고 하기 보단 기억에서 떠올리지 못했다고 생각해야겠지요. 일단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약간은 배우니까요. 저는 그 내용들도 탐탁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기억하지 않는 것, 모르는 것이야 말로 죄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역사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성은 똑같은 잘못을 다시 하지 않게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 또 반성하지 않고 하는 실행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문국현을 찍었던 사람도 이명박을 찍었던 사람도 촛불시위에는 참가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과연 반성했을까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정, 반성 없이 군중에 몸을 던지는 행위는 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갈지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 by | 2008/07/26 01:34 | 감상문 | 트랙백(1) | 덧글(4)
읽기 시작한지는 제법 오래 되었는데 감상은 정말 너무 늦게 적는군요. 촛불집회 시작하기 전에 빌렸던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결국 끝까지 다 읽지 못했습니다. =_=; 마지막 챕터 바로 까지 읽고 대출기한이 다 되어서 연장하려고 봤더니 연장할 수 있는 횟수가 남아있질 않더군요. 그래서 반납하고 나서 다시 빌려야지 하고 학교에 가서 반납했는데 예악도서라고 되어있어서 그만 중간에 반납하고 말았습니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되었나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글은 참 감상문 쓰기가 좀 그런 것이, 그야말로 상황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분석에 대해서 감상을 쓰는 것이 좀 쌩뚱맞다랄까……. 하여간 이론을 가지고 현상을 분석하거나 혹은 지금까지의 분석을 비판하거나 하는데 제가 뭘 알아야 할 말이 있을 텐데 뭐 아는 것이 있어야 말이죠; 그래도 몇 가지 건진 것이 있다면, 저의 오랜 고민에 대한 학자의 견해를 접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저는 예전부터 정말 궁금했던 것이 있었답니다. 궁금한 것이 많을 나이도 아니고 해서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대체 왜 한국의 정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작동하지 않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일단 다수결이죠. 그렇다면 상위 20%보다 그 외가 다수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데 왜 대체 나머지 80%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한국의 정치가 작동하는지가 저는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1) 일단 선거를 제외하고 개인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반영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다는 점(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새천년민주당이나 정치적 노선으로 보자면 큰 차이가 없죠.), 지금까지의 2) 정당이 선거를 위해서만 작동하는 정당이었다는 점(선거시즌 외에 정당이 하는 일이 그닥 없죠), 3) 민주화운동의 직접적인 세력이 정치세력화하지 못했다는 점, 4) 군부가 재벌중심의 경제개발정책을 실행했고 그 부작용이 나타났고 이후에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무능으로 재벌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등등. 이런 이유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 하겠습니다. 살찐 돼지들과 거짓놀음 밑에 단지 무릎 꿇어야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책에서 대안을 이야기 하고 있긴 한데 그 부분은 아직 못 읽은 고로 -_-; 그에 대한 평은 나중에 다 읽고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세상살이가 묘하게 억울하다던가 뭔가 짜증이 나는데 이유를 모르겠다던가 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나가는 분들 중에 혹시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집회하러 가기 전에 읽고 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 by | 2008/07/17 02:12 | 감상문 | 트랙백 | 덧글(0)
근황이라기 보단 요즘 여러분들이 비슷한 질문을 하셔서 몇 자 적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을 만나면 역시 한번쯤은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촛불 집회지요. 촛불 문화제라고도 하는 가 봅니다만 명칭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여러분들이 저에게 촛불집회 나가느냐고 물어보는데 이 질문에 바탕엔 “너는 당연히 촛불집회에 나가겠지?”라는 가정이 바탕으로 깔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얼마나 바른 생활을 해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하하하;
근데 사실 저는 촛불집회에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나갈 생각은 그다지 없구요. 이유를 말하자면 저는 촛불집회에 나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촛불집회를 바라보면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점은 정말로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섭취할 일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대선 때 이명박, 이회창, 문국현, 정동영, 권영길을 각각 찍었던 사람들이 모두 함께 촛불집회에 참가하고 있었죠.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촛불집회에 나왔던 걸까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 현제 한국의 20%외의 전부를 소외하는 정치, 소를 빨리 길러서 팔기 위해 소에게 소를 먹임으로 발생하는 광우병... 이런 것을 생각하고 나왔을까요? 저는 촛불집회에 나왔던 사람들이 위에 말한 것을 생각 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살기가 이렇게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죠. 그래서 전 닥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촛불집회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저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시민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의미 방법이 선거 외에 거의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 외에 또 많은 긍정적인 의미가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전 여전히 닥치고 있을 예정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반성하지 않고 사람에 휩쓸리는 것을 즐기는 사람을 경멸할뿐더러, 또 여전히 누군가가 “변혁의 때가 오면 난 적어도 거기에 반대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럼 그냥 닥치고 반대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하는 종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by | 2008/07/12 01:41 | 잡담 | 트랙백 | 덧글(1)
지인의 추천으로 “우리는 사랑일까?”라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작도 읽어 보았던 터라 쉽게 읽었네요. 두 사람이 만나고 해어지는 과정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는데 그 분석이 책 한권에 들어가다 보니 다소 심층적이지 못한 점이 아쉽긴 했지만 즐거운 책읽기였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촉매” 챕터였습니다. 간추리자면 누군가의 욕망이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서 충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죠. 음식점에 가서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가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일차적으로 생각해볼 때 욕망이라는 것은 매우 자주적이고 즉각적이며 불연속적이고 또 우연한거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거나, 물을 마시고 싶다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다거나,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거나. 이런 욕망들은 실재로 자주적이고 즉각적이고 불연속적이고 우연적입니다. 그러나 욕망의 종류가 바뀌게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죠.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라던가 “어떤 옷을 사고 싶다.” “유망한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 “잘 먹고 잘 살고 싶다(흔히 말하는 웰빙?).” 라던가 하는 욕망들은 곰곰이 생각하면 온전히 나로 비롯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롯하는 거죠. 욕망조차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빚어지는 겁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지상 과제인 세상, 유행을 따라가야만 멋진 옷차림인 세상,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것은 아주 통일적이고 연속적이고 또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망들은 욕망의 주인을 소외시킵니다. 왜냐하면 욕망이 비롯한 이유나 그 성취방법이 모두 타인의 시선을 통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추구해야할 무엇인가가 다른 누군가로부터 주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충족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요?
사람은 누구나 혼자일 수 없습니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나를 알기 위해서, 혹은 다른 여러 이유로 자신 외의 무언가를 바라죠. 그리고 주인은 노예가 됩니다. 호랑이의 멋진 가죽이 결국 호랑이를 밀림 안에서만 살게 하듯이 말이죠. 아마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 by | 2008/06/28 02:27 | 감상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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